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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읽기] 당신이 옳다 - 정혜신
    이것저것 읽어보기 2021. 1. 24.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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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가면서까지 누군가에게 헌신을 다하기는 힘들어하면서도, 나만을 사랑해주고 아껴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신이 옳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이를 갈구한다. 이 책은 왜 인간에게 나만을 사랑해주는 존재가 필요한지에 대한 답을 주진 않는다. 단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알려주며, 이런 삶을 통해 나 역시도 살아나갈 수 있는 길임을 은연중에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생기는 많은 궁금증에 대해 절대적인 답변을 주고 있지는 않지만, 내 삶을 조금 더 밝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적절한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저자는 먼저 ‘나’라는 존재의 개별성을 무시하는 사회의 시선들을 통해 현대인들의 아픔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감에 있어서 다양한 사회에 속하게 된다. 회사에서의 ‘나’, 가정에서의 ‘나’, 친구들에서의 ‘나’. 신기하게도 각 그룹에서 속한 나의 모습은 묘하게 다르다. 때로는 본래의 나와는 너무도 다르다고 느껴져 그 그룹에서의 삶에 힘들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적, 직업적 소임은 때와 장소에 따라 갈아입어야 하는 옷처럼 한 존재의 삶에서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달라지는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자기의 사회적 역할과 나를 과도하게 동일시 하며 고통에 빠진다. 이뿐이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도 모르게 내 자신이 남들에 의해 일반화되기도 한다. ‘XX대’를 나온 사람. 30대 후반의 노총각, 공대생 출신 등.존재의 개별성을 무시한 채 한 집단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의 특징을 집단의 특징으로 일반화 짓는 세태는 진짜 ‘나’를 잃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런 스트레스 상황을 나의 소중한 사람에게 얘기할 때, 상대방으로부터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일명, 충조평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서적인 ‘내 편’이며 ‘네가 옳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충조평판이 아닌 나의 마음이 어떤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없기에 우리는 아프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나의 외모, 권력, 재능, 학벌과 같은 외면적인 모습이 아닌 나 존재자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조차도 부정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말한다. 감정은 내 삶속에서 내 존재의 내면을 알려주는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이다. 부모의 죽음에 대해 수개월을 슬픔으로만 지새운다고 해도, 은퇴 이후 극도의 불안함을 가지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감정이다. 따라서 너무나 당연한 감정이기에 충조평판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만약 나에게 그들의 고통을 얘기해준다면, 그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어 듣고, 그의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고,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그 사람, 바로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누구나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나 자신의 그 사람의 한 세상이 될 수 있고 결정적인 치유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한 그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녀는 그 해답이 ‘정확한 공감’이라고 한다. 정확한 공감을 위해서는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먼저, 무엇보다도 공감에 있어서 내가 먼저라는 생각이다. 상대방을 공감하기 위해서 나를 소홀히 하거나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양방을 공감하지 못하면 어느 일방의 공감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방 존재 자체와 그 존재의 마음에는 공감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다. 나를 괴롭게 만드는 공감은 공감이 아니다. 내가 먼저다. 잊지 말자. 마지막으로 특정 행동에 대한 보편적인 판단을 통해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그의 마음 자체에 대해 묻고 공감해야 한다. 누군가의 행동과 생각은 그의 마음과는 별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나, 집단 사고에 의해 파악된 규정된 모습으로 그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자체에 대해 집중하며 공감해야 한다.

     

    그렇다면 ‘공감’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공감의 과녁은 언제나 ‘존재’ 그 자체, ‘감정’ 그 자체다. 어떤 이의 생각, 판단, 행동이 아무리 잘못됐어도 그의 마음에 대해 누군가 묻고 궁금해한다면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다. 공감이 힘든 상황이라면 내가 모르는 부분을 인정하고 차근차근 물어봐서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상황에 대해 상대방과 다르게 느끼더라도 기꺼이 이해하고 수용해야 한다. “나는 미처 몰랐지만 너는 그랬구나, 그랬었구나”라고 말이다. 또한, 과거의 상처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더라도 현재의 감정에 대해 먼저 묻고 알아줘야 한다. 공감받아야 할 대상은 과거의 상처 받은 내가 아니라 그 상처를 곱씹으며 현재 그 문제를 토로하고 있는 그 시점의 그 존재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공감은 단순히 내가 사랑하는 상대방만을 위한 행위일까. 아니다. 그를 진심으로 공감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을 비춰보는 계기 역시 함께 마련된다. 상대방을 정확하게 공감하는 과정 속에서 행해지는 깊은 성찰은 불안하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할 수도 있으나 결국 자기 성찰을 위한 건강한 혼란이다. 자기 내면을 알 수 있고 치유할 수 있는 기회라서 축복이며, 혼란스러워지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인 것이다. 이 공감의 기회는 나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또한, 공감을 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이 감정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릴 필요는 없다.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고 그래서 모든 감정은 옳다. 왜 이런 감정이 생기는지 곰곰이 내 자신과 내 상황을 짚어봐야 한다. 다시 한번 나의 성찰의 시간이 된다.

     

    이렇듯 공감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힘든 일이다. 본 책에 실린 사례들의 대부분도 엄마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얘기였다. 결국, 엄마와 자식 정도의 유대 관계가 아니라면 누구도 이토록 절실하게 상대방에게 공감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슬퍼졌다. 만약 내 부모님이 없다면 나를 완벽하게 공감해주는 이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걸까. 그런 사실을 은연중 알고 있었기에 나는 끊임없이 나를 완벽하게 사랑하고 공감해주는 이를 절실히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내 감정에 대해 이해하고 나 스스로에 대한 공감을 통해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은 그렇게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나 스스로를 공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어떠한 상황에도 나를 사랑하고 공감해줄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작 부모는 자녀를 공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하지만 부모 자신을 공감해줄 수 있는 이는 누가 있는 걸까. 부모의 위치에 있으면서 마음이 흔들릴 때 누가 나를 공감해줄 수 있을까. 결국 안정적인 부부 관계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면 내 자녀를 혼신의 힘으로 공감하는 과정을 통해 내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다시 한번 결혼이라는 과정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지금의 내 부모만큼 내 존재 자체를 완벽하게 사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정해신은 자신이 이렇게 남에게 헌신적인 공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녀 남편의 존재로 돌린다. 그의 헌신적인 공감이 있었기에 자신은 남에게 그만큼의 공감을 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많은 불안감이 있지만, 그래도 일단 내가 조금이라도 좋아하고 그 존재 자체를 아끼는 이들에게 정해신의 방식으로 공감을 해보자. 그러다 보면 진정으로 나를 공감해 줄 수 있는 친구든, 연인이든, 아니면 인간 이외의 존재든 그런 존재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그 존재로 인해 나도 더 이 세상에서 존재하고프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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