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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대성당 - 레이먼드 카버이것저것 읽어보기 2021. 5. 23. 16:17반응형
레이먼드 카버.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건 대략 2-3년 전 즈음. 미국에서 쓸쓸한 유학생활을 하며 답답한 레이저 방에 갇힌 채 끊임없이 데이터를 찍어내야 했을 때, 그나마 나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것이 빨간 책방이라는 팟캐스트였다. 레이먼드 카버라는 존재는 이 빨간 책방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팟캐스트에서 소개된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호감이 가고 재밌어 보여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미치도록 샘솟았다. 마침 나의 부족한 영어 실력에 진절머리가 나던 터라, 영어 공부라는 좋은 핑계로 Raymond Carver의 Cathedral을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무려 원서로 읽기로 하였다. 영어로 읽었음에도 느껴졌던 그 전율이란...
시간이 흘러 나는 지금 한국에 돌아와 있다.유학 생활은 끝을 맺게 되었지만 내 삶이 굴러가는 모양새는 비슷한 듯하다.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리는 하루 일과. 일과 후 간단한 운동. 간간히 만나게 되는 친구들과의 시간. 여전히 난 예전보다는 덜 열정적이지만 빨간 책방을 듣고 있다. 과거의 에피소드를 듣다 그리운 이름 레이먼드 카버를 다시 듣게 되었다. 그때의 그 감동을 느껴보고 싶은 생각에 다시 한번 국문으로 번역된 책을 읽게 되었다. 너무나 유명한 책이었기에 성북구의 어느 도서관에서나 모두 대여가 가능했고, 요즘 주말마다 들러서 책도 보고 살짝 졸기도 하는 월곡 꿈 그림도서관으로 향해 그 책을 읽어나갔다. 3시간 정도를 들여서 겨우 2/3 정도를 읽을 수 있었기에, 그리고 독후감을 남기기에는 책의 대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기에, 책을 대출해 집으로 돌아와 그 마지막 남은 부분까지 끝내버렸다. 카버의 소설을 음미하지 않고 너무 급하게 읽어 버린 느낌이 들지만 뭐, 그렇게 내 삶이 여유롭지는 않으니까..
레이먼드 카버의 얘기는 일상에서 일어날법한 얘기들이다.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면서 생기게 된 일이라든지, 렌트 아파트에서의 일상이라든지, 부부의 일상적인 모습이라든지. 대체로 가족이라는 큰 무대를 벗어난 모습을 그리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소설을 관통하는 큰 의도는 무엇일까? 나는 이해라고 생각한다. '이해'라는 키워드가 핵심을 짚지 못하는 단편소설도 존재하는 것 같지만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안겨주었던 소설들에서는'이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단어처럼 느껴졌다.
처음 소개되는 '깃털들'. 평범해 보이는 부부가 직장동료의 집을 방문하면서 생기게 된 일을 다루고 있다. 그 친구 부부의 집에는 언뜻 보기에는 기괴해 보이는 것들 투성이다. 부부가 그 친구의 집에 도착하여 처음 마주친 것은 커다란 공작새. 내 상상 속에서는 자못 아름다우리라 예상했지만 부부가 마주한 그 공작새는 기괴할 뿐이다. 친구의 집을 들어서자 못난 치아의 본을 뜬 형상이 놓여있기도 하고, 그 집에서 가장 사랑받아야 할 존재인 아기는 추했다. 하지만 못난 치아는 남편의 따스한 마음을 기억하기 위한 아내의 고집이었고, 공작새는 아내가 소망했었던 것을 남편이 이뤄준 것이었으며, 아기는 형상이야 어찌 되었든 그 둘의 사랑의 결실이었다. 타인의 입장에서는 일견 기괴해 보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런 집을 방문한 이후 그의 아내는 남편과 아이를 갖기로 결심한다. 출산 이후 그의 아내는 조금은 뚱뚱해지고, 남편이 사랑해왔던 긴 머리칼을 짧게 잘라 버렸다. '이해'의 잘못된 모습이라고 보이기는 하지만 그 부부는 직장동료 가정의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고 해야 할까..?
'칸막이 객실'의 내용은 조금은 우울하다. 자신이 폭력을 휘둘러 집을 떠나게 만든 아들은 먼 프랑스 어딘가에서 유학 중인데 그에게 한번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던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그는 긴 휴가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의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기차 안. 그는 묘한 긴장감 때문인지 좀처럼 잠에 들지 못한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그는 선물로 준비했던 손목시계를 도둑맞아 버린다. 아들이 기다리고 있지도 모를 도착지 역에서 그는 하차하지 않고 기차에 머무른다. 이상한 기차의 움직임에 그는 자신이 속했던1등 칸이 아닌2등 칸으로 옮겨가게 되고 그만 그가 속해 있던 칸이 다른 기차로 옮겨가고 만다. 모든 그의 짐과 가방과 함께 말이다. 2등 칸의 승객들에게 뜻하지 모를 환호를 들으며 그는 거기에 속해버린다. 그리고 조용히 잠이 든다. 뭐랄까. 이 아빠는 아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을 끝끝내 숨기려 하다, 시계를 잃어버리며,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의 기차를 놓치게 되며, 안도감에 이른다. 그가 진정 바라는 바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본 책의 해설 부분에 레이먼드 카버가 본인의 아들과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한 부분이 있었다. 그는 아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자녀가 없는 삶이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이다... 이 대목에서 어쩌면 이 소설은 조금은 자전적인 소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이 소설에는 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나온다. '셰프의 집'에 나오는 남자는 알코올 중독으로 그의 아내와 헤어졌고 뜻하지 않은 행운에 전처와 행복한 여름을 보내게 되지만 그 행운이 사라지자 그는 무기력한 알코올 중독자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보존'의 남편은 직장을 잃고 무기력하게 술만을 마시며 나날을 보낸다. 그의 아내는 아마 그를 곧 떠날 것이다. '신경 써서'에 나오는 남편 역시 아마도 알코올 문제로 인해 아내와 별거 혹은 이혼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그의 아내는 그의 귀지를 처리해주어 그의 가장 골칫거리 문제를 해결해주지만, 그녀 역시 한걸음 그를 벗어나 떠나간다.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의 남편 역시 알코올 문제로 알코올중독치료센터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그는 같은 처지에 놓여있던 한 남자가 그의 아내와 만나 행복하게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에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오길 기대한다. 어쩌면 이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들은 모두 카버의 단면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이 책에는 그의 연대기가 소개되어 있다. 실제 알코올 중독자이기도 했던 카버는 그의 아내와 별거 이후 약 6년 만에 이혼에 이르게 된다. 아마 그의 소설에서 묻어나는 전처에 대한 그리움은 실제 그가 느꼈던 그 감정과 동일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 A small, good thing' 역시나 큰 감동을 안겨주는 내용이다. 그의 아들의 생일날 사랑한 아들을 사고로 잃게 된 부부와 그 사정을 모른 채 그 아이의 케이크를 찾아가지 않는 부부에게 작은 복수를 하게 된 제빵사. 결국 그 부부는 이제껏 있어왔던 장난 전화가 그 제빵사의 짓이란 걸 알고 그에게 복수하고자 찾아갔지만, 그들은 마침내 대화로써 서로의 오해를 풀게 된다. 제빵사가 건네주는 따스한 빵과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대화... 병원에서 말끔하게 차려입은 의사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아이가 괜찮을 거라고 되뇌었지만,결국 아이는 사망하게 되었다. 의사들이 건넨 사과는 그들에게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진정한 위로는 오히려 하루하루 힘들게 벌어먹고 살아가며, 삶에 찌들어 보이는듯한 제빵사, 그와의 대화가 그 부부를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었다.
'열' 역시 마찬가지다. 갑자기 자녀와 나를 버리고 자신의 직장동료와 눈이 맞아 홀연히 떠나버린 그의 아내. 그런 혼란한 상황 속에서 그가 처음으로 구한 고등학생 베이비시터는 엄청난 문제를 일으켜, 그를 더욱더 절망 속으로 빠뜨린다. 그런 그때 구원처럼 찾아온 베이비시터, 웹스터 부인.그녀를 소개해준 건 다름 아닌 그의 전처 직장의 현 남편에게 부탁하여 찾게 된 베이비시터였다. 하. 삶이란 이렇게 복잡하다. 그와 그의 버려진 아이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준 베이비시터는 바로 그런 인연으로 소개받게 된 존재였다. 뜻하지 않은 열병이 난 그는 웹스터 부인과 웹스터 씨에게서 병간호를 받게 된다. 하지만 웹스터 부부는 그에게 더 좋은 직업을 찾게 되어 아쉬운 작별을 고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제 이런 이별에 상처 받지 않았다. 아픈 동안 웹스터 부부와 나누었던 대화가, 그가 겪었던 일들을 공유하면서 그는 한 단계 도약하게 된다. 그의 전처가 그렇게 되뇌었던 의미 못할 말,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게 큰 무언가가 될 것이다, 라는 그녀의 말이 진실로 이뤄진 것이다.
대화가 그들을 이해시키는 매개체였다면 이 단편소설의 제목을 장식하고 있는 '대성당'은 그보다 더 큰 무언가를 통해 이해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내의 친구라는 맹인. 남편은 그의 존재가 달갑지 않다. 그의 아내가 맹인과 작별하기 전, 그녀는 맹인의 부탁으로 자신의 얼굴을 그가 어루만졌던 그때를 잊을 수 없었다며, 신비스러운 경험이었다며 말하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맹인이 아내를 잃게 되어 그들의 집으로 방문하게 된다. 남편의 알 수 없는 적개심은 끝이 없다. 하지만 그와 단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고, 우연히 티브이에 방영되고 있는 대성당이 어떻게 생긴 건지 소개해달라는 맹인의 부탁에 그는 말로써 표현해 보려 노력하지만 여의치 않다. 그때 맹인은 그에게 종이와 펜을 가져오라고 말하고는 그에게 대성당을 그려보라고 한다. 그리고 맹인은 그가 펜을 쥐고 있는 손을 포개어 쥐었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그였지만 그는 펜을 쥐고 그려나간다. 그리고 맹인은 그제야 대성당의 모습을 이해하였다며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때의 그 전율이란. 그제야 그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순간에는 대화보다 더 직관적인 경험으로 누군가를 이해할 수도 있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은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그들이 겪게 되는 모습도 너무나 일상적으로 보이지만, 무언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지울 순 없다. 그런 느낌이 드는 건 나 역시 누군가에게 절실히 이해받고 싶지만 그들처럼 속시원히 이해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카버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중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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