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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읽기] 당신들의 천국 - 이청준
    이것저것 읽어보기 2021. 1. 18.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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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받은 책. 사실 큰 기대를 품고 읽은 책도 아니었으나 오랜만에 고전에 속하는 대작가의 소설을 읽고 싶기도 하였기에 망설이지 않고 구매를 하였다. 소설 중에는 책의 제목만으로는 제목이 유추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처럼 ‘당신들의 천국’ 역시 제목이 가지는 강렬함이 있었고 소설을 읽는 내내 그 제목에 반영된 기본 사상이 글 하나하나에 투영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천국은 천국이지만 ‘우리들’의 천국이 아닌 ‘당신들’의 천국.. 과연 그런 천국은 정말 당신들의 ‘천국’이긴 한 걸까?

     

    소설은 전지적 작가적 시점으로 한 대상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바로 조백헌이라는 한센병 병원의 5대 병원장으로 부임한 인물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임에도 조백헌을 바라보는 이의 시점이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는데 1부에서는 이상욱이라고 하는 보건과장, 2부에서는 조백헌 원장 그 자신,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는 이정태라고 하는 취재기자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대체로 조백헌 원장의 부임 이후에 일어나는 일대기를 시간 순서로 그리고 있으나 때때로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청준 작가가 본 소설의 주요 설정을 실제 사건과 인물들을 토대로 구성하였다는 것이다. 조백헌 원장에 대응되는 인물은 조창원이라고 하는 인물이며, 주민들에 의해 살해당한 4대 원장 주정수는 스오 마사스에라고 하는 인물의 사건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구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실존하며 생존하는 인물을 모티브로 소설을 그려서일까. 본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조백헌 원장은 소설의 제목과는 대치되게도 ‘당신들의 천국’이 아닌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물이었다.

     

    이 소설 속에서는 인물 사이사이에 느껴지는 갈등, 사회적인 약자가 느끼는 차별 등 많은 문제들이 거론되고 있었으나, 내가 느끼기에 소설의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회의 지배층에 속한 이들이 이상적인 사회를 설계하기 위해서 어떠한 덕목을 갖추어야 하는지와 같은, 지배-피지배 계층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지 않았나 추측한다. 본 소설의 해설 부분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와 있어 놀랐다(물론 전체적인 맥락은 내 생각과는 많이 다르고 훨씬 깊이 있는 해석이었지만 말이다).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 정도의 정치적인 알레고리 소설이라고 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이청준은 ‘당신들의 천국’을 통해 우리 시대의 지배층들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피지배층들을 지도하고 이끌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싶지 않았나 싶다. 특히나 소설이 작성된 시점인 1974년에서 1976년의 기간 동안 반유신 운동이 거세게 불타오르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 어떠한 변혁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런 시대상의 반영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나의 어설픈 추측과 함께 좀 더 세부적인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부에서는 조백헌 원장 부임 이후의 행적들을 이상욱이라고 하는 인물에 의해 그려진다. 소설의 제목 때문인지 나는 끊임없이 조백헌 원장의 행동 하나하나를 의심하며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욱은 ‘동상’이라는 단어를 통해 나와 함께 원장의 의도를 의심한다. ‘동상’이란 무엇인가. 지배자의 동상이란 사실 피지배인들이 지배인에게 바치는 아부, 사탕발림 그 이상의 의미가 될 수 없는 무가치한 물건일 뿐이다. 동상을 만들기 위해서 피지배인은 그들의 피와 돈을 바쳐야 하지만 얻어지는 것은 지배자의 만족감일 뿐이다. 특히, 지난 원장에 의해 이상욱을 포함한 섬 주민들은 그들이 믿었던 원장에 대한 배신을 당한 바가 있었다. 그들을 위한 천국을 건설해줄 것처럼 주민들을 앞세워 이런저런 일들을 벌였으나 결과적으로 그가 얻고자 한 것은 주민들의 천국이 아니라 그의 동상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상욱의 의심은 일견 합리적이게도 보이기도 하였고 나조차도 조백헌 원장의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장교 출신이라는 점과 북한 말투를 쓴다는 그런저런 설정들이 부정적인 암시를 품고 있는 게 아니길 바라면서 말이다.

     

    조백헌 원장은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과의 신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먼저 장로회를 조직해 주민들의 민심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주민들로 구성된 축구회를 구성하고 성공한다. 그런 작은 성공을 밑거름으로 하여 그는 결국 그가 정말로 추진하고 싶었던 목표를 시행한다. 바로 간척사업이었다. 너무 터무니없는 사업에 사실 나조차도 주민들 만큼이나 놀랐다. 사실 조백헌 원장에 대한 이력은 장교 출신이라는 것 말고는 없었기에, 세심하고 면밀한 과정 없이 갑작스럽게 이런 어마어마한 사업을 추진하려 한다는 사실에, 아무리 소설적인 생략이라고 할지라도 도저히 용납하기 힘들었다. 물론 간척 사업을 통해 본인들의 땅을 일궈내는 것만큼 값진 것은 없고, 그 의미만큼은 큰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하려면 체계적인 어떠한 사고방식을 토대로 이뤄줘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과정 없이 결국 조백헌 원장은 그 일을 그의 지배술로 실행시키고야 만다.

     

    2부의 주요 내용은 간척사업에서 벌어지는 조백헌 원장과 주민들 특히 황희백 노인이라는 장로와의 마찰이 주로 다뤄진다. 조 원장은 그의 목숨을 담보로 사업을 진행시켰고, 사업은 예상대로 난항을 겪는다. 사업이 난항을 겪을수록 조 원장은 인간적인 불안함을 느낀다. 이런 불안함은 일견 동정의 여지가 느껴지긴 한다. 현대 정치인들 중에는 이룰 수 없는 무수한 약속들을 입으로만 내뱉고 지키지 않으면서도 그에 대한 불안감을 표출하는 이는 거의 없는 듯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조 원장의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늦은 밤 한 무리의 주민들이 조 원장의 숙소로 들이닥치며 말도 안 되는 간척사업을 행한데 대한 책임을 물으러 찾아간다. 물론 조백헌 원장이 일반적인 정치인이라면 그 시점에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 원장은 자신이 지니고 다니는 권총에 총알 한 방을 장전하고 그들에게 건넨다. 그만큼 그는 이 사업에 있어서 진심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권총을 잡아들지 못한다. 이런 사실에 이상욱 과장은 외친다. “그래서 당신들은 오늘 밤 이 원장에게 당신들의 피의 값을 받으러 몰려왔고, 여기 이제 원장님은 당신들에게 심판을 내맡기고 나서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또 무엇이 두려워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 거냔 말이다..... 원장을 쏠 용기가 없는 인간들이라면 오늘 밤에 저지른 당신들의 배반을 원장한테 심판받을 용기라도 보여야 할 거 아니냔 말이다. 이 더럽고 못난 문둥이들아....” 황희백 노인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조백헌 원장의 진심을 보았다면 이상욱은 본인을 포함한 문둥이라는 피지배계층의 종속적인 사고방식에 절망한 그런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조 원장의 고뇌에 황희백 노인은 그를 채근한다. “문둥인 남 위해 일하는 법 없다” 다들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니 원장의 의지가 확고하고 그 의지의 발원이 정말 주민들을 위함에 변함이 없다면 계속적으로 실행해보라는 독려의 말이었다.

     

    안타깝게도 간척사업은 조백헌 원장의 임기 내에 끝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렇게 그는 섬을 떠나게 되었다. 3부에서는 소록도에 몰래 취재를 들어왔다가 결국 쫓겨났었던 이정태 기자가 조백헌 원장이 떠난 후 7년 뒤 섬을 취재하기 위해 다시 방문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조백헌은 더 이상 이 소록도의 원장이 아니었으나 그는 섬의 주민으로서 마을의 일들을 돕고 있었다. 섬은 크게 바뀐 것이 없어 보였으나 실제로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환자들의 자녀들과 비환자들의 자녀들이 함께 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섬을 에워싸고 있었던 철조망도 사라져 있었다. 이제 섬의 왕래도 자유로워져 있다. 그런 작은 변화 하나하나는 조백헌 전원장이 현 원장과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일이었으며, 조백헌은 건강인 처녀 서미연과 음성 병력자이며 자기혐오에 갇혀 있던 윤해원을 결혼에 이르기까지 한다. 사실 본 소설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섬을 ‘문둥이의 방식’으로 탈출하여 원장과 섬주민을 배반한 이상욱 과장이, 조백헌 전원장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어쩌면 이상욱이라는 모습을 빌어 작가의 생각을 읊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가 바라는 천국을 한마디로 정리하긴 힘들 것 같다. 그래도 굳이 정리해보자면 아마 이 말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지 않나 싶다. “진정한 천국이라면 전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먼저 선택이 행해져야 할 것이고, 적어도 어느 땐가는 보다 더 나은 자가 자기 생의 실현을 위해 그 천국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즉, 이상욱은 ‘당신들’의 천국이 아닌 ‘우리들’의 천국이 되기 위해서는 그 모든 계획들이 그 세상에 사는 이들에 의해 결정되고 만들어져야 한다는, 그런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얘기인 듯싶다. 조백헌 원장이 준 미션은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목표가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의도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구성원 스스로 나온 목표가 아니라면 그건 우리들의 천국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조백헌 원장은 섬의 원장으로 잠시 부임한, 결국에는 이 섬을 떠나게 될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이상욱은 “운명을 같이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절대의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통해 조백헌의 진심은 이해하게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믿기 쉽지 않다는 고백을 한다. 그의 충고에 의해 혹은 그 역시 이상욱의 생각에 동조하였기에, 조백헌은 더 이상 원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록도로 돌아와 그의 신념을 바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 ‘우리들’의 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조건은 모두 마련되었다. 하지만 정작 조백헌 전원장에게는 천국을 건설할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이 바로 이상욱이 추구하는 방향성의 모순이다.

     

    사회 구성원을 지배/피지배라는 개념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는 어쩔 수 없이 지배/피지배가 만연해있다. 내가 속해 있는 조직도 마찬가지이다. 굳이 나누어 보자면 나는 지배에 속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항상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이 구성원들을 위한 일인 것인지 나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구성원을 위하는 척하며 나의 천국을 만드는 일인 것인지 고민할 때가 많다.  물론 곰곰이 생각해 보면 후자에 더 가깝다고 느낄 때가 많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들의 천국’이 아닌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고 싶다. 내가 목표로 하는 지향점과 구성원의 목표점이 일치하길 바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일까. 일단 황 노인의 말처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서로의 모습과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서로가 행하려고 하는 일에 대한 의심은 없어질 것이다. 이 의심만 사라져도 큰 성과다. 이상욱의 조언 역시 중요하다. 내가 그들과 같은 운명 공동체라는 것을 항상 강조해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책무를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 책무에 의해 받게 될 압박감과 또는 잘못된 결과에 따른 고통은 함께 분담하고자 해야 한다. 물론 그들 스스로의 천국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충분한 자유의지를 주고 방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조직 생활에서는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는 항상 그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족이지만, 사실 나만 해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의 의미점을 찾지 못했다... 하하.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은 잘 쓰인 소설이다. 소설이라는 측면에 걸맞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면서 읽을 수 있었으며, 인물들의 갈등이나 고뇌가 많은 이들에게 공감과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그뿐이랴? 우리 사회에 속해 있었지만 차별받는 이들에 대해서도 넌지시 그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으며, 시대상에 걸맞게 지배층에 대한 경각심을 울리는 내용까지 담고 있다. 게다가 오랜만에 번역책이 아닌 나와 같은 모국어를 쓰는 이가 긴 인고의 창작 시간을 거쳐 끄집어낸 값진 문장들을 읽을 수 있었기에 더욱 뜻깊었다. 내 생에 최고의 소설이라는 자리에 오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지만,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기에 잊혀지기는 쉽지 않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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