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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활기] 버림의 미학
    주저리 주저리 2020. 10. 17. 22:00

    4년 전 구매를 하였던 Garmin의 vivoactive HR이라는 스마트워치가 고장이 났다. 몇 달 전부터 운동 트래킹을 위해 몇몇 조작을 하다 보니 묘하게 느려지는 감이 있었는데 이상하긴 했다. 배터리가 조금 빨리 닳아버리긴 했어도, 조작 중 반응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긴 했어도 사용하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었던 녀석이었는데 말이다. 이 녀석이 갑자기 사망선고를 받은 사건은 수영장에서 일어났다. 물론 방수가 되는 녀석이었고, 수영 트래킹도 가능한 녀석이었기에 당연히 아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열심히 수영을 하고 있었다. 문득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왼손 손목에 있었던 그 녀석을 쳐다보았는데 화면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마치 들어가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그 녀석의 내부에 흘러들어 간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그 녀석은 다시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고, 그렇게 잠정적 사망 선고를 언도받았다. 노후화에 의해 녀석에게 느슨한 부분이 생겼고, 이 틈새로 수영장 물이 들어간 것이 원인이 된 게 아닌가 싶었다.

    한창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고 이 기록들을 차곡차곡 앱에 쌓아놓고 있었기에 대체할만한 다른 녀석을 얼른 구매해야 할 것 같았다. 핸드폰도 갤럭시 S10으로 바꿔 사용하고 있어 갤럭시 워치도 옵션으로 생각해 보았는데 Garmin 앱에 기록되어 있는 내 여정들이 제대로 옮겨질지 의문이었다. 그냥 편하게 Garmin 워치를 구매하는 게 나아 보였다. 결국 예전에 쓰던 녀석의 상위 버전으로 보이는 Garmin사의 Vivo active 3을 130불이라는 가격에 아마존에서 구매를 하였다. 2주간의 기다림이 필요했지만 아마존 계정에 남아있던 기프트카드 잔액도 처리할 수 있었고 한국에 이미 수입된 제품을 구매하는 것보다는 약 40불가량이 저렴하였다. 2주라는 기다림보다 40불의 값어치가 나에겐 더 컸다.

    새로 온 스마트워치는 10일 만에 배송이 완료되었고 역시나 새것이라 그런지 빠릿빠릿했다. 예전 녀석은 직사각형의 애매한 모습이었다면 새로 온 아이는 동글동글한 녀석이었다. 여전히 고장 난 내 오래된 시계는 책상 위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올려져 있었다. 몇 번 더 작동 유무를 테스트해보았으나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 아이는 그 명을 다한 것이었다.

    4년은 함께 보내온 vivoactive HR


    나는 오래된 물건들을 잘 버리지 못한다. 버리고 나면 항상 생각이 나기도 하거니와 언젠가 필요한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조금 웃기긴 하지만 그런 이유로 수집하게 된 물품 중 하나가 바로 비닐봉지이다. 재활용 측면도 강하지만 여기저기서 받은 비닐봉지들은 정말 유용하게 쓸 일이 많다. 냄새나는 쓰레기들을 봉지에 한 번 밀봉해서 버리는데도 쓸 수 있고, 크고 짱짱한 비닐봉지는 장바구니로도 쓸 수 있다. 적당한 사이즈의 박스도 항상 모아놓고 튼튼한 쇼핑백은 선물포장용으로 쓸 수 있기에 무조건 창고에 보관해 놓는다. 오래된 전자제품도 작동하든 말든 일단은 보관행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런 일들이 조금은 미련한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전자제품은 작동이 잘 되고 누군가가 값을 후하게 쳐줄 때, 중고나라든 당근 마켓이든 넓은 세계로 나아가 새로운 주인을 찾는 것이 그 삶이 더 값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창 넓은 1 베드룸 아파트에서 살다가 서울의 10평짜리 1.5룸에 이사 왔었을 때도 귀한 것 마냥 모셔두었던 녀석들이 그냥 공간만을 축내는 녀석들이었다는 걸, 이사를 거듭하며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전보다는 조금은 더 잘 버리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긴 해도 항상 추억이 깃든 물건을 버리는 건 슬프다. 이건 엄마를 닮은 것 같기도 한데, 엄마도 참 쓰잘데기 없어 보이는 물건들을 많이 모아 두신다. 부산 집에 내려가서 왜 이런 걸 모아두었냐고 잔소리를 하면 언젠가 쓸 일이 있을거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니와, 나나 동생이 쓰던 10년 전의 낡은 가방을 아직도 장롱 위 구석진 곳에 고이 모셔두기도 하고 말이다. 하긴 나라도 자식이 쓰던 물건들은 버리기 좀 그럴 것 같긴 하다. 여하튼 4년이라는 짧으면 짧지만 그래도 꽤나 긴 세월을 함께 해 온, 그리고 하루 최소 12시간은 나와 함께 하였던 녀석을 냉큼 쓰레기통에 버리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박스까지 함께 모아두었던 그 녀석...

    하지만 책상 위에 올려둔다고 이 아이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어찌 되었든 이 녀석도 현재 자신의 위치에 걸맞은 곳으로 가야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내 책상 위에서 평생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폐기라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 CO2나 작은 유기물로 분해되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이런 생각이 드니 갑자기 이 친구를 아무런 아쉬움 없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오늘 이 친구를 폐기의 세계로 던져버렸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이렇게 몇 장의 사진을 남기고 이 친구를 위해 몇 자의 글을 남기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의 조우


    버려진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와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흐드러져 버릴 수밖에 없을 테고, 삶 역시 언젠가 자연스럽게 나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누군가에게 아니면 어떤 것에게 버려지거나, 아니면 내가 버려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너무 버림에 대해 미련을 가지진 말자. 어찌 되었든 버림이라는 과정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기억과 경험과 추억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나에게 남아 있을 것이고, 그게 좋든 싫든 나의 일부분이 되어버렸을 터이니 말이다.

    자 이제 새로운 스마트워치가 왔으니 내 다이나믹한 운동기록들을 다시금 차곡차곡 새겨보자. 다행스럽게도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녀석은 저 먼 곳으로 가버렸지만 그 아이가 기억해준 기록들은 내 앱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이제 새 친구의 기억과 함께 같이 나의 과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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