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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내가 죽던 날 – 박지완
    이것저것 해보기 2020. 12. 25. 16:00

     

    왜 이 영화의 제목은 ‘내가 죽던 날’일까. 시놉시스에 의하면 분명 현수라는 형사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은데 왜 ‘너가 죽던 날’ 이 아닌 ‘내’가 죽던 날인걸까. 실제로 영화가 그리는 대부분의 시점은 현수라는 인물에 의해서 구체화된다. 그렇다면 이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영화의 제목이 지칭하는 ‘나’가 자살한 소녀인 세진이 아니라 현수를 암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나 자신이 ‘내가 죽던 날’이라고 담담히 말할 수 있다는 건 실제적인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인 죽음 혹은 심리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런 묘한 의문을 품으며 영화를 감상하였다.

     

    영화는 현수와 이혼 변호사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변호사가 읊조리는 얘기들을 볼 때 그녀의 남편이 바람을 핀 모양이다. 영화는 묘하게 친절한 듯 친절하지 않다. 일어났던 사건들을 명확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여러 정황들을 통해 이런 일이 있었으리라는 추측만을 할 수 있는 여지만을 제공한다. 현수가 휴직을 하게 된 원인이 그녀가 일으킨 어떤 사고 때문으로 보이며, 그 사고의 심증적 원인은 그녀의 남편의 바람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 정도. 사실 이 부분도 영화의 중반 이상을 봐야지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다. 현수는 믿었던 남편의 배신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고 그녀의 유일한 탈출구는 복직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효과적인 복직을 위해 그녀의 상사는 한 사건의 보고서를 마무리 지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그렇게 영화는 전개된다.

     

    현수가 맡은 일은 중요 증인 신분으로 보호를 받고 있던 소녀의 자살사건에 대한 마무리였다. 모든 정황을 보았을 때 그녀는 자살을 한 것이 맞아 보였다. 자살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절망적인 상황, 곱게 쓰인 유서, 절벽 앞에 놓인 신발, 그리고 시체를 찾을 수도 없을 정도의 거센 폭풍우가 불어 닥쳤던 그 날씨. 하지만 그녀는 허투루 사건을 보지 않고 꼼꼼하게 정황을 살펴본다. 사실 섬마을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영화를 시청하는 입장에서 지역 형사와 마을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와 비슷한 사건사고를 언론을 통해 접하기도 하였고, 기존 영화들의 클리쉐 상 섬마을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은 섬마을 사람들의 폐쇄적인 특성에 기인하여 끈덕진 음모로 벌어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세진은 이제 막 고2가 된 어린 소녀였다. 풍족한 가정에서 자라왔으며, 생모는 예전에 돌아가시고 성격적으로 중대한 결함이 있어 보이는 오빠와 함께 였으나, 그런대로 새엄마에게 의지하며 행복하게 지내왔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가정의 풍족함은 아빠의 부정한 사업에 의한 것이었고, 그 부정함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갑작스럽게 그녀의 행복은 송두리째 빼앗긴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는 아빠를 잃었고, 가장 힘든 순간 그토록 찾았던 새엄마는 멀리 도망가버렸다. 오빠라는 존재는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당한 채 소녀는 아빠의 범죄 사실이 기록된 수첩을 경찰에게 전달한다. 그 정도로 그녀는 이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렇게 그녀는 아빠가 저지른 범죄의 주요 증인이 되어버렸다. 참고인 보호 자격으로 그녀는 낯선 섬마을로 유배를 당하게 된다. 사실 어린 소녀가 겪기에는 모든 게 생소했고 어려웠으리라. 어쩌면 현수는 그런 그녀에게 깊이 감정 이입을 했을 법하다. 자신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남편의 외도 사실을 갑자기 목도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사소한 사고를 일으켰고, 그녀의 일터였던 자리 역시 빼앗겨 버렸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이번 사건을 ‘자살’로 손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현수는 사건을 살펴보다 세진을 보호하기 위해 보내어졌던 경관과 세진이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정황적인 증거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경관이 세진을 멀리한 시점에 자해를 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역시 알아차린다. 그렇게 그녀는 수소문 끝에 그 형사를 만났고 그 날은 그 형사의 결혼식이 있었다. 아마 그 형사와 세진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 사실을 적시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현수가 내뱉는 발언에 대해 보인 그 형사의 분노를 통해 우리는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뿐이었다. 외로웠던 세진을 그는 한 때의 장난처럼 아니면 혹은 정말 그 당시는 진심이었기에 그런 선택을 하였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 때의 동정이었을 뿐 그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외면하고 모른 채 하며 자신의 삶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현수는 마지막으로 세진과 가장 깊은 정을 나눴던 새엄마를 가까스로 찾아낸다. 그녀는 세진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그녀의 안위가 더 큰 관심거리였다. 이런 비정한 사실 속에서 현수는 절망한다. 이렇게 외롭게 버려진 소녀를 누구 하나 진심으로 걱정한 이가 없었다는 그 참혹한 사실에서 말이다. 마치 이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 버려진 나를 아무도 구원해주지 않는 것처럼... 그러다 우연히 현수는 세진의 친모가 안장된 곳이 어디인지 알게 되고 그곳을 마지막으로 수사하며, 방명록에서 낯설지만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순정’이라는 인물....

     

    그렇게 현수는 세진이 지내왔던 섬마을의 집주인 순천댁과 세진의 관계를 알아차린다. 남자 형사가 세진을 버리고 떠나 뒤, 사실 세진은 자살을 결심해 유서를 쓰고 자해를 하였다. 그런 그녀를 발견하여 치료해 준 순천댁은 안쓰러운 그녀를 진심으로 보살펴 준다. 그리고 순천댁에게는 식물인간 상태로 병상에 누워있는 조카딸 ‘순정’ 이 있었다. 그 셋은 그렇게 서로의 아픔을 나누며 세진은 삶에 대한 희망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순천댁은 세진이라는 존재 안에서는 그녀가 행복하지 못하리라 생각해서였을까. 자신과 같이 영원히 외딴섬에 갇혀 새장의 새처럼 살아야 할 인생이 그려져서였을까. 순천댁은 자신의 조카딸인 ‘순정’의 이름으로 여권을 만들어주고, 세진의 죽음을 위조한다. 그렇게 그 날 세진은 죽었고 영원히 병상에 누워있어야 하는 순정은 세상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다.

     

    현수는 이 모든 사실을 알아차렸고 순천댁을 찾아간다. 순천댁은 형사가 모든 사실을 알아차렸다고 생각하며 자기가 다 꾸민 일이라 자백한다. 하지만 현수는 조용히 그녀에게 세진의 사진첩을 전달해 주기만 한다. 그리고 그녀는 복직을 거부한다.

     

    마지막 장면. 현수와 세진의 만남. 태국인지 베트남인지는 잘 모르겠다. 현수는 세진을 만나기 위해 이곳저곳을 한참 다닌 모양이다. 아마도 그녀는 그녀가 알아차린 사건의 실체를 목도하고 싶었음이다. 다행스럽게도 세진을 진정으로 위하는 단 한 명의 그 사람 때문에 그녀는 꿋꿋이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고 있었다. 세진은 뜨거운 햇볕에 조금은 그을었지만 건강해 보였으며 예전의 그 분노 어린 눈빛이 아닌 그 나이 때의 순수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둘은 해지는 석양이 보이는 야외 탁자에 앉아 맥주를 마신다. 세진과 현수 모두 그들이 한 때 사랑했던 이들에 의한 상처로 만들어진 상처를 팔에 안고 있다. 하지만 현수는 세진 팔의 상처가 아닌 그녀의 팔에 그려진 타투가 예쁘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진은 오히려 그녀 스스로 그 상처를 직시하며 말한다. 잘 아는 타투이스트가 있으니 현수 역시 상처에 타투를 새겨보라고 말이다. 그렇게 그 둘은 지나간 시간만큼 성장해 있었다.

     

    나는 항상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나란 존재는 왜 이 시점에, 이 땅 위에, 이런 존재로 태어나게 된 것일까. 사실 삶이란 강압적인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생을 원한 적이 없었고, 태어남에 있어서 나의 선택권은 무의미했다. 그에 비해 죽음은 어떠한가. 사실 죽음도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올 수도 있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할 수도 있고, 나도 모르던 암이 내 몸속에 자라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미친 누군가에 의해 난도질 당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삶에 비해서 죽음은 선택권이 있다. 바로 자살이라는 선택지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가끔은 내 삶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유지하고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가장 나은 선택지를 선택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럼에도 이 선택지를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주위에 누군가가 나로 인해 많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어서이고, 그래도 이 무의미한 선택에 의해 태어난 삶에서라도 최대한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기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 아닐까. 결국 나는 나를 위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삶을 버텨나가고 있다.

     

    하지만 말이다. 삶은 길고 영원히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아갈 순 없다. 만약 나의 부모님과 내 형제가 이 세상에 없어진다면 나를 진정으로 생각해주는 이가 있을까. 그런 순간이 오면 나는 정말 손쉽게 가장 그 쉬운 선택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걸까. 그건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나를 사랑하는 내가 있으니까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누군가의 힘이 필요하다면 그게 내 스스로가 되도록 노력해보자. 사실 이 사실을 잊을 때가 많지만 나를 사랑하는 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정말 잘 알지만,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고 버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벌써 인생의 절반을 달려 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남은 인생은 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던 두 인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내가 죽던 날은 결국 내가 다시 태어나게 된 날이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내’가 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에 ‘내가 죽던 날’이라고 담담하게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주위에 아직까지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런 이들을 위해 내 사랑과 관심을 조금만 나눠주자. 그 작은 보살핌이 그 사람이 아름답게 꽃 피우는 모습을 볼 수 있는 큰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내 스스로는 나를 사랑하는 연습을 열심히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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