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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읽기] 한 말씀만 하소서 - 박완서
    이것저것 해보기 2021. 8. 29. 19:56

    요즘에는 딱히 일에 집중이 잘되지 않기도 하고 저녁이나 주말 시간을 하릴없이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나의 생활에 조금 변화를 주고자 책을 열심히 읽어보려고 했다. 여러 책을 살펴보다 드디어 선배가 추천해줬던 3권의 책 중 마지막 책, “한 말씀만 하소서”에 이르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박완서 작가님의 소설은 오직 한 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만을 읽어보았었다. 이 소설 역시나 작가님의 자전적인 내용이 담긴 글이었는데 묘사가 구성져서 마치 내가 겪은 추억담마냥 읽을 수 있는 따뜻한 글이었다. “한 말씀만 하소서” 역시 작가님에게 있었던 슬픈 사건을 묘사한 수기로, 그 사건을 겪으며 작가님이 느낀 고통과 격한 생각들에 대해 정말 여과 없이 토로한 글이라 이전에 읽었던 글과는 느낌이 너무나 달랐다. 그 사건이란 바로 작가님이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게 된 일이다. 이 글이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쓰인 것이 확실해 보이는 이유는, 글을 읽으면서 아들이 어떠한 연유로 죽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궁금증이 유발되었으나, 이에 관한 얘기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이야기를 도저히 글로써도 쓰고 싶지 않아서이겠지. 그럼에도 이 글이 출판되었어야 함은,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녀의 일기는 어떤 살아있는 메시지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작가님의 회고록을 읽다 보니 문득 그녀의 삶이 궁금해졌다. 물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통해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결혼한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박 작가님은 동화백화점에서 일하던 당시, 백화점 측량기사였던 호영진 씨와 만나 1953년 그러니까 23살에 결혼을 하였다. 결혼한 뒤에도 글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않다가 1968년에 열린 박수근 작가님의 유작전을 보고 글을 쓸 결심을 하게 되었단다. 회고록에 가까운 글을 쓰다 자신은 상상력이 보태진 이야기를 쓸 때 더 즐거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 그녀는 첫 데뷔작 “나목”을 1970년에 쓰게 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40세이다. 늦은 데뷔였음에도 그녀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또한, 슬하에 1남 4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 자녀들 모두 모든 부모가 부러워할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하여 주었다. 박 작가님은 본래 무교였으나 1984년, 그러니까 54살의 늦은 나이에 가톨릭에 귀의하였다. 하지만 4년 뒤 남편이 폐암으로 사망하였고, 같은 해 8월 31일에 막내이자 단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다. 그때 그의 아들은 25살의 나이에 불과하였으며, 서울대 의대를 졸업해 인턴을 마치고 전문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시기였다. 그렇게 박 작가님의 일기는 그의 단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지 12일 뒤인, 1988년 9월 12일부터 시작되었다.

     

    일기는 작가가 아들을 잃은 슬픔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부산에 사는 맏딸인 호원숙 작가가 그녀를 모시고 부산에서 요양 생활을 지내게 되며 시작된다. 그녀의 슬픔이 어떠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지만, 식음을 전폐함은 물론이요, 잠이 오지 않아 매일 술로 지새운 흔적들을 통해 작게나마 유추할 수 있었다. 아니 굳이 유추해보지 않아도 말이다. 문득 10년 전 얼굴만 알던 어떤 형의 장례식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결혼한 지 채 몇 개월이 되지 않은 분이었는데, 직장으로 인해 기러기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혼자 머무르던 집에서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고, 하필이면 제때 연락이 닿지 않아 때늦은 시간에 주검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급하게 연락을 받아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당일 저녁 장례식장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만 해도 장례식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았었고, 호상이라는 표현이 싫긴 하지만 참석한 장례식도 모두 자연의 순리에 맞는 그런 이별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장례식은 달랐다. 너무 급하게 마련되어 아직 빈소도 제대로 차려지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공기가 사뭇 무거웠다. 너무 무거워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끼리도 안부조차 물어보기 어려웠다. 식장에서 울려 퍼지는 가족들의 울음소리…. 특히 그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10개월 동안 자신의 품 안에서 보듬었던 아이를 나보다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그 슬픔은 얼마나 막막할까. 자신이 자식을 잡아먹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비난을 스스로 할 만큼 절박한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만약 신을 믿고 있는 분이었다면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준 신이 너무나 원망스럽고 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박완서 작가는 신에 대한 분노를 거침없이 글을 통해 토로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느님에 대한 원망과 비난이 담긴 이 글이 실린 곳은, 가톨릭 잡지 ‘생활성서’라는 곳이었다. 글의 초반부에 박 작가님이 신에 대해 느끼는 원망은 대단하여, ‘골백번 고쳐 죽여도 더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은 자신의 살의를 위해서라도 존재해야 한다.’라며 맹렬하게 저주하였다. 하지만 그 저주가 부자연스럽다거나 불쾌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진실한 감정의 표현에 나의 마음은 무거워지고 숙연해졌으며 가슴이 먹먹해 왔다. 작가는 정말 이 글을 씀에 있어서 진솔하였는데, 만약 아들 대신 4명의 딸 중의 하나를 잃었더라면 조금은 덜 애통하고 덜 억울하지 않았을까 하는 사특한 생각을 하였다는 사실을 그대로 적었다. 물론 이 끔찍한 생각에 그녀는 오랜만에 기도하였다며 자신의 잘못을 바로 정정하였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퇴고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부족하고 부끄러운 생각을 지워버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스스럼없이 출판하였다는 점이 대단하였다. 아마 자식을 잃은 부모가 어떠한 상상까지 할 수 있는지 그 나락의 끝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녀가 왜 이렇게 슬퍼하는지 이해가 가기도 하였다. 그녀의 단 하나뿐인 아들은 서울대 의대에 합격할 만큼 똑똑하였으며, ‘자기가 애를 태우며 생명줄을 붙들어준 환자가 살아나서 자기를 전혀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 쓸쓸함’이 끌려 마취과를 선택할 만큼 그녀를 닮아 감수성이 풍부하였다. 그런 자식을 빼앗아간 신에게 그녀가 어떠한 원망을 퍼부어도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녀는 하느님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그렇게 애타게, 하느님으로부터의 한 말씀을 듣기 위해 기도하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예수가 마지막에 남겼던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인용하며 하느님은 결국 계시지 않는다는 얘기를 예수가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서슴없이 꺼낸다. 또한, 자신을 위로해 주기 위해 방문했던 마음 씀씀이가 넉넉했던 맏딸의 친구에 관해 얘기를 나누면서도, 그 친구의 집안이 성공한 데에는 독실함이 한몫했을 것이라는 얘기에 분노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나의 기도는 부족했기에 이런 시련이 주어진 것이냐며 말이다. 그렇게 작가는 고뇌하고 힘들어하다 분도수녀원에서 홀로서기를 할 기회가 주어졌고 맏딸의 집에서 멀지 않은 수녀원에서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그 수녀원에서 그녀의 인식에 전환점이 마련되는 계기가 생긴다.

     

    초기 수녀원에서의 생활 역시 이전과 큰 차이는 없었다. 홀로되기를 원해 홀로되어 보았으나 슬픔은 나아지지 않았다. 신이 계신지에 대해 애걸하며 데굴데굴 굴러보았으나 돌멩이처럼 보잘것없을 뿐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어떤 어린 수녀의 말 한마디에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그 수녀에게는 말썽꾸러기 동생이 있어 집안이 편한 날이 없었다고 한다. 항상 그 수녀는 왜 내 동생이 저래야 하냐며 원망만 하다 ‘왜 내 동생이라고 저러면 안되나’라고 생각을 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동생과의 관계도 호전되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작가는 이 말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왜 내 아들을 데려갔느냐!’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왜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아야 하나’라는 다소 어려운 인정을 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수녀원에서 어떤 한 부인을 만났다. 그 부인 역시 자식에 의한 문제로 고통을 받다 수녀원을 찾은 이였고, 작가를 붙잡고 끊임없이 하소연한다. 하지만 젊고 창창한 단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작가에게는 어처구니없고 보잘것없는 걱정일 뿐이었다. 그렇게 작가는 말했다. 저는 외아들을 잃은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때가 처음으로 박 작가님이 타인에게 그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 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제 그녀는 자기의 슬픔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슬픔에 대한 인정으로 그 부인의 얼굴에 생기가 돈 것을 느꼈다는 박 작가님. 하지만 그녀는 남의 불행에 위안을 주고자 마치 자신의 큰 불행을 자랑인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보란 듯이 그 부인과의 식사 자리에서 카레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마치 나는 당신보다 더 큰 아픔을 겪었지만 이렇게 잘 살아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싶은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무게는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고, 그녀는 그 식사에 단단히 체해 변기를 붙잡고 먹었던 모든 것을 게워내었다. 그리고 그녀는 변기 앞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온전한 육신이 있음에라도 감사해야 함을 말이다.

     

    그 후 그녀의 육신은 기가 막히게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끼니에 맞춰 배가 고파왔고, 자신의 몸이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침이 느껴졌다. 그녀는 살고 싶은 충동이 자신을 수녀원으로 이끌었던 게 아니냐며 자조한다. 그리고 그녀는 한 말씀만 해달라고 했던 주님이 분명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해주셨을 거라 믿었다. 다만 자신의 귀가 독선과 아집으로 막혀 듣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대신 내 몸이 밥을 원하게 함으로 우선 먹고 살라는 계시를 내려주신 게 아닌가 하는 기가 막힌 논리를 설파한다. 하하…. 이런 게 믿음의 힘이란 것인가.

     

    그렇게 그녀는 수녀원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서울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서울집에서는 여전히 아들과의 추억이 그녀를 괴롭혔고, 아무도 그녀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 막내딸이 있는 미국 LA로 향했다. 지상낙원 같은 곳이었으나 이윽고 그녀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말과 리듬이 그녀에게 큰 이질감을 주었고 얼마 있지 못해 귀국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타지 생활에서 한글에 대한 그리움까지 깨닫게 되어, 귀국한 이후 그녀는 글쓰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하느님에게 인사드린다. “주여, 저에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여 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소서.”

     

    본 글은 단순히 자식 잃은 엄마의 슬픔만을 담았다고는 보기 어렵다. 오히려 엄청난 고통을 겪은 한 인물이 어떻게 슬픔을 극복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그 극복의 과정을 세세하게 그려내었다. 어떤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녀의 일기는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이끌어내리라 생각이 든다.

     

    문득 선배는 왜 나에게 이 책을 추천해 주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이 선배랑 술을 마시다 보면 내 머릿속에만 해왔던 부정적인 생각들을 마구잡이로 토로할 때가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생에 대한 얘기인데, 내가 항상 내세우는 지론이 바로 ‘생은 고통’이라는 것이다. 물론 살아가면서 기쁜 일도 많지만, 솔직히 오히려 더 고통스럽고 무의미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사실 우리는 태어남에 있어서 특별한 선택권이 없었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생을 맞이하여 힘들게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이고 불편일 뿐이라며…. 그나마 우리에게 죽음에 있어서만은 선택권이 있는 것 같다는 미친 소리를 해대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을 하는 인간과 시간을 나눈다는 게 그에게도 큰 고통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건 초등학교 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성적인 성격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고 내가 아닌 누군가와 관계를 맺게 되면서 기쁜 것보다도 고통스러울 때가 더 많았다. 그래서인지 항상 죽음에 관한 생각을 해왔었는데 엄마가 눈에 밟혔다. 만약 내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엄마는 어떻게 되려나. 어릴 때는 말이다. 나는 엄마나 아빠가 늦게 들어오시면 잠을 자지 못했다. 혹시라도 사고가 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게 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해 너무 무서웠다. 나이가 들면 아이가 된다고 하던가. 이제는 엄마가 그러는 것 같았다. 매일 나에게 차 조심하라며 걱정하고 잠시라도 전화를 받지 않거나 하면 엄청나게 걱정을 하더라. 문득 내 어린 시절의 생각들이 떠오르며 슬그머니 엄마가 걱정되었다. 정말 갑자기 라도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엄마는 박완서 작가님만큼 힘들어하지 않을까. 게다가 엄마는 작가님만큼 슬기롭지도 못해 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드니 조금 비겁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엄마가 없으면 내 마음대로 선택해도 괜찮을까.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조차 이 세상에 없다면 나를 무조건 걱정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럼 이 세상을 떠남에 있어서도 조금은 문제없지 않을까. 아마 내가 그나마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아가려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더 필요할 것 같다. 나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가 생기지 않으면 나는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결국, 자녀가 필요하다는 얘기인 것 같은데 내 삶을 유지하기 위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자니 정말 미친 생각인 것 같다. 여하튼 아직 건강하게 잘 계신 우리 부모님에게 박완서 작가 같은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잘 지내봐야겠지. 뭐 그 선배는 그런 생각을 전달해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나 특유의 복잡한 생각이 만들어낸 망상일 확률이 가장 높을듯하다….

     

    정말 이별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듯하다. 나를 소중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사실 나는 무가치한 존재임을 알게 되어 마음이 멀어지기도 하고, 내가 그나마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부정당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슬픔이나 이별의 순간에도 내 배는 고파올 것이고 잠은 올 것이며, 새로운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에 행복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슬픔은 슬픔대로 인정하고 지금 주어진 삶은 주어진 대로 열심히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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