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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A River Runs through It) – 로버트 레드포드
    이것저것 감상하기 2020. 11. 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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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그 근본은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오랫동안 만나온 친구라 할지라도, 설령 나의 부모와 형제라 할지라도, 그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조차도 버거운 것이 현실인데 어떻게 남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흐름을, 몬태나주 시골의 소소한 미국 가정을 배경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맥클레인 목사의 두 아들인 노먼과 폴이다. 사실 주요 화자는 노먼이지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주체는 폴인 경우가 많았다. 노년의 노먼의 독백과 함께 그들 형제의 어린시절로부터 영화는 시작한다. 신실한 신앙심과 함께 완벽한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가진 맥클레인 목사와 그를 내조하며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맥클레인 부인은, 그 시절 이상적인 미국인 백인 부부의 모습이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탓에 노먼과 폴 역시 무난한 형제애를 가지며 추억을 쌓아간다. 그들의 어린 시절은 평범한 남자 형제들의 모습과 다름 없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형인 노먼보다 폴이 조금은 더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좋아했다는 정도.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골목길에 숨어 지켜만 보던 여성들 앞에서 허리춤을 돌리며 박수를 받고, 또 그것을 즐길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의 작은 차이는 성장할수록 커간다. 세상을 겪어갈수록 모난 구석은 깎이고 닳아버려 둥글둥글 해질 법도 한데, 어떠한 이들에게는 오히려 자신 만의 모습을 더 날카롭게 연마시키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폴의 경우는 후자였다. 그의 적극성과 두려움이 없는 성정은 일반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게 만들었다. 보트를 타고 폭포를 건너가는 일들과 같은 것 말이다. 그런 폴을 노먼은 어떻게든 쫓아가주려고 하지만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런 폴을 노먼은 한편으로는 부러워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자신에게 없는 무모함과 아버지의 가르침을 벗어나 자신만의 낚시법을 벌써부터 개발해내어 자신을 앞서가고 있는 듯한 모습들에서 말이다.

     

    노먼과 폴의 미묘한 경쟁관계는 그 이후에도 계속된다. 동부에 위치한 명문대에 진학하고 학위를 마쳤으나 특별한 직업이 없었던 노먼과 고향의 대학 진학하고 지역 신문의 기자로서 일하게 된 폴. 그 둘은 고향에서 재회하며 서로의 연인들과도 만남을 가진다. 폴은 그의 자유분방함이 이끌어서인지 인종차별이 만연한 그 곳에서 인디언 여성을 만났으며, 노먼은 그의 성향대로 무난하지만 묘하게 자신감에 넘치는 백인 여성을 만난다. 그 둘은 한 부모에게서 동일한 가르침을 받았으나 그렇게나 다른 두 존재였다.

     

    이런 다른 두 존재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는 다름아닌 낚시였다. 아버지와 함께 오랜 시간 낚시를 함께 해오면서 그들에게 낚시는 즐거운 취미일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어떠한 행위로 여겼다. 노먼의 여자친구인 제시 번즈에게 캘리포니아에서 잠깐 돌아온 오빠가 있었는데, 제시 가족들의 성화로 어쩔 수 없이 낚시 동행 일정을 잡게 된다. 노먼은 어색함을 풀고자 폴에게 함께 가자고 제의를 하였고 내키지 않았으나 폴은 노먼의 부탁이라 어쩔 수 없이 참가하게 된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나인가. 카사노바처럼 생긴 그녀의 오빠는 약속시간을 한참 넘긴 시간에 나타나, 만취한 상태로 그것도 동일하게 만취상태의 여자를 끌고 와, 비틀대며 낚시터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끝내 사라져 버린다. 폴은 노골적으로 그를 경멸하였고, 노먼 역시 사랑하는 여자친구의 오빠였지만 용납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런 그를 내팽개치고 그들만의 낚시 시간을 가졌다.

     

    노먼에게는 근원적으로 알 수 없는 침착함과 우울함이 있었다면 폴에게는 담대함에서 나오는 위태로움이 있었다. 어렴풋이 예전에 이 영화를 봤었 을 때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인지 모르겠으나 그의 선택하나하나가 왜인지 모르게 죽음에 가깝게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어느 날 폴은 노먼과 함께 술에 취한 채 불법 도박 시설에 들르게 된다. 노먼은 이미 폴이 그런 위험한 곳에 출입한다는 얘기를 들어왔으나 같이 가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평생에 한번 볼까말까한 그런 인물 군상들을 보며, 알 수 없는 불쾌한 기분을 느꼈고, 폴은 그들과 다툼 끝에 쫓겨났다. 노먼은 폴에게 함께 돌아가자고 하지만 폴은 내일 새벽에 낚시를 함께 가자는 말을 남기고 다시 그 도박장으로 향한다. 어릴 때의 보트로 폭포를 건넜을 때와는 달랐다. 노먼은 더 이상 폴의 길을 함께 걸을 수는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노먼은 집으로 돌아왔고, 낚시 약속 때문이었을까 폴은 약속시간보다는 늦긴 하였으나 어찌되었든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행운이 계속될 수 있을까.

     

    노먼은 폴을 부러워했으나 폴 역시 노먼을 부러워했던 것 같다. 노먼이 제시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였을 때에도, 그녀와 평생을 함께 살고 싶었다는 얘기를 했을 때에도, 그리고 그가 U of Chicago의 교수자리를 제안 받았을 때에도, 그는 분명 기뻐했음에도 묘한 감정을 지울 수는 없었다(브래드 피트의 연기 덕분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미묘한 감정을 완벽하게 표정만으로 드러내 준 것 같다). 그렇게 노먼의 성공을 축하할 겸 아버지와 함께 그들은 낚시를 떠난다. 폴은 그 날 그 만의 화려한 낚시 기술을 보여주며 거대한 송어(?)를 낚아 올린다. 가족들 모두 최고의 낚시꾼이라 칭송하며 그렇게 행복하게 이야기는 마무리 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카고로 떠나기 며칠 전 폴은 경찰소로부터 연락을 받게 된다.  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불법 포커 도박장의 괴한에 의한 죽음이었다. 그나마 노먼과 맥클레인 목사가 위안을 삼을 수 있었던 것은 폴의 오른쪽 주먹이 으스러져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의 죽음이 일방적인 패배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맞은 최후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폴의 죽음은 그렇게 담담하게 묻혀져 갔다. 아마 그 가족들에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꺼내어 공유하기도 어려운 기억 이었을 것이다. 그들 가족에게는 폴이 왜 그런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독실한 신자인 그들은, 그때는 신을 원망하고 있었을까. 그렇게 시점은 어느덧 두 아이의 아빠가 된 노먼의 가족이 참여한 맥클레인 목사 설교 시간으로 돌아간다. 맥클레인 목사는 설교 시간에 말한다. 사람은 항상 누군가를 돕고 싶어한다고. 하지만 정말 도움이 필요한 시점에 우리는 도와줄 수 없는 경우가 많고 설령 그 도움이 정말로 그에게 필요한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말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사랑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한때는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왜 그 사람은 그런 선택을 하였는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론 그 행위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을 지 까지는 몰랐더라도 말이다. 그런 그 사람의 선택을 원망하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이해해 보려고도 하였으나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될수록, 그 사람을 아끼고 사랑했던 감정마저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이해는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한 충분 조건일까. 앞 서에도 언급했지만 나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게 현실인데 남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완벽한 이해만을 추구한다면 영원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 정말 누군가에 대한 완벽한 이해 없이 완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아직 나의 작은 역량으로는 넘어서기 힘든 어려운 고개처럼 보인다. 특히나 맥클레인 가족의 일처럼 혈연의 얽히지 않은 관계라면 더더욱 말이다. 폴과 노먼은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할 때도 있었고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였으나,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다. 형제로서 함께한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맥클레인 부부 역시 자신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두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였으며 그들을 사랑했다. 바로 사랑스러운 아들들이었기 때문이다. 제시의 망나니 오빠 역시 그들의 가족들에게는 완전한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래 혈연 간의 사랑이라면 완벽한 이해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부부라는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는 걸까. 완벽한 이해 없이 누군가를 완벽하게 사랑하게 되었을 때 되는 것일까. 맥클레인 부부는 그런 완벽한 사랑을 만났기에 가정을 꾸리게 되었으며 노먼 역시 제시에게서 그런 불가항력적인 사랑을 느꼈기에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영화에서는 마치 그렇게 그려지긴 했지만..). 설령 완벽한 사랑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흐르는 시간 속에 쌓이는 추억들로 그들은 완벽한 이해 없는 완벽한 사랑을 만들어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처음부터 너무나 완벽함을 꿈꾸어서는 안될지도 모른다. 연인관계에서도 그렇고 친구관계에서도 그렇고 모든 관계에서로부터 말이다.

     

    영화는 다시 플라잉 낚시를 하고 있는 노년의 노먼으로 돌아간다. 이제는 홀로 남았으나 여전히 그는 낚시를 한다. 그는 나이 들었으나 여전히 강물은 흘러가고 있고 그 강물의 흐름 속에 그리고 수천년을 그 자리에 있어왔을 바위들 속에 그의 기억들은 여전히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문득 나에게는 나를 존재하게 하는 활동이 무엇이 있는지 곰곰이 고민하게 된다. 어쩌면 시답잖게 남기고 있는 이런 글들이 내 삶의 궤적이며 내 존재 가치의 흔적이 될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런 활동을 누군가와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일지도..ㅎㅎ

     

    어쩌다보니 또 구구절절 이상한 얘기를 한 것 같은데 결과론적으로 좋은 영화다. 영상도 아름답고 배우들의 연기도 아름답고 내용도 아름답다. 한 3년 전에 봤었던 영화인데도 마치 새로운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단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내 뇌 기억 저장공간의 휘발성이 다소 증가한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찌되었든 이 영화 덕분에 넉넉한 주말 저녁을 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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